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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이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됐는지를 알고 싶다면, 네덜란드 출신의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를 알아야 할 거야. 호프 신부는 공정무역 회사 ‘막스 하벌라르’를 만든 사람이자 공정무역의 효시야. 호프 신부는 오아하카의 커피재배 농부들과 20년간 함께 일하며 커피협동조합(UCIRI)을 설립했어.


네덜란드 빈농의 아들, 신부가 되다 


판 데어 호프는 1939년 네덜란드 브라반트 지방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어. 그의 집은 젖소를 키우고 소작으로 벼, 감자, 사탕무를 재배했지.또한 그의 아버지는 가톨릭 정당 시의원이었어.


판 데어 호프는 어린 시절 가난과 전쟁을 겪었어. 1940년 5월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판 데어 호프의 가족들은 전쟁을 피해 피란을 갔어. 전쟁을 하는 동안 그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피신해 왔어. 이처럼 호프 신부의 어린 시절의 기억은 항상 전쟁과 관련이 있었지.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 www.fairtrade.de


호프 신부와 형제들은 엄격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집안에서 자라났어. 그는 10살 쯤 되었을 때 신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 영리한 아이였던 그는 초등학교를 남들보다 빨리 졸업하고, 12살이 되었을 때 헬몬트에 있는 신학교에서 기숙생활을 했지. 신학교 생활은 규율이 엄격했지만 그는 열다섯 형제가 있는 집에서 자랐기 때문에 엄격한 규칙에 익숙했어.


1961년, 호프 신부는 아스턴에 있는 성심회 성직자수도회에서 사제가 되기 위한 수련을 했어. 젊은 수련 수사들은 30명의 인원으로 수련을 시작했어. 하지만 많은 수련 수사들이엄격한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탈락했어. 호프 신부는 30명이던 수련 수사가 7명이 될 때까지 수련 수사 생활을 했지.


3년 후, 호프 신부는 수련을 마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 그가 공부를 하던 1960년대에 제3세계운동과 베트남전쟁이 일어났는데, 그는 이 두 가지에 깊은 관심을 가졌어. 


냉전 시절에 미국이나 유럽 같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을 제1세계라 불렀고,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을 제2세계라 불렀어. 제3세계는 거기 속하지 않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의 많은 나라들을 가리키는 말이야. 이런 나라들에서는 강대국들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역사를 돌아보고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났지. ‘제3세계 운동’은 그런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야.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베트남이 공산주의가 되려고 하자, 미국이 베트남을 침공해서 벌어진 일이야. 결국 베트남이 미국의 공격을 견뎌냈고, 많은 사람들이 선진국이 제3세계 국가들을 억압하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되었어.


호프 신부는 스물여덟 살이 되었을 때, 사제가 되기로 한 것에 대해 심리학자와 상담을 했어. 사실 그에게 가톨릭 사제로서 봉사를 하는 일이 가장 흥미로웠고, 예전에 제3세계 운동에 참여한 것도 좋은 경험이 되었어. 호프 신부는 유럽국가인 네덜란드 출신이었으니 제1세계에 속한 인물이었지만, 제3세계 사람들을 위해 가톨릭 신부로서 봉사하고 싶어 했고, 그런 활동도 선교의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


호프 신부는 1968년에 서품식을 마치고 정식으로 사제가 되었어. 호프 신부는 1969년 여름에 캐나다 오타와 대학에서 교수로 일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어. 그래서 한 학기 동안 캐나다에서 강의를 한 뒤 칠레에서 연구를 하기로 했어. 그런데 오타와와 칠레에서의 경험이 그의 인생을 바꿔놨지.


호프 신부는 오타와의 마약 중독자 보호 시설인 하프웨이하우스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어. 시설에서 지내는 청소년의 절반이 자살로 목숨을 끊는 것을 본 그는 매우 슬프고 혼란스러웠어. 그가 하프웨이하우스에서 봉사활동을 하면서 배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사귀고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것이었지.


멕시코에서 커피 농부들과 만나다


1970년부터 호프 신부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연구 활동을 했어. 하지만 1973년 쿠데타가 일어나 아옌데 대통령이 살해되고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호프 신부는 도망을 갈 수밖에 없었어.


그래서 그는 멕시코로 피난을 갔어. 호프 신부는 자라서 신부가 된 뒤에까지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감했고, 그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어 했어. 그래서 그는 빈민가의 신부로 일하기 시작했어. 제대로 된 사제가 파견된 적이 없었던 빈민가에서 호프 신부는 희망을 줄 수 있었지. 미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늘어났어. 그러나 빈민가에 들어와서 여러 단체들과 활동하면서 멕시코 정부의 미움을 샀고, 비밀경찰들의 위협을 받아야 했어.


판 데어 호프 신부가 직접 회고한 내용을 볼까. “그 당시 나는 늘 바빴다. 여러 단체에 속해 있었으며 어디서든지 함께 일을 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위험해져 갔다. 나는 벌써 두 번이나 비밀경찰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그들은 나의 파괴적인 일을 중단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체포할 것이라 했다. 그것은 거짓 협박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제거되었다.” 판 데어 호프 신부와 니코 로전이 쓴 <희망을 거래한다>에 실린 글이야.


비밀경찰로부터 계속 위협을 받던 신부는 건강도 나빠졌어. 그래서 멕시코 남부의 연방국가 오아하카로 이동했어. 그는 소도시인 익스테펙 인근의 바랑카 콜로라다 마을에 머물기로 했어. 이 때까지 도시 빈민들을 위해 일해왔던 호프 신부는 시골로 가서 커피재배 농민들과 만나게 돼. 프란스 판 데어 호프 신부는 바랑카 콜로라다에서 커피재배 농부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어.



이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가정이 커피를 통한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해. 하지만 옛날부터 농부들은 헐값에 커피를 팔아왔고, 낮은 수입에 익숙해져 있었어. 농민들은 건강을 망칠 정도로 일을 하지만, 하지만 일한 양에 비해 매우 적은 돈을 받아. 그래서 신부와 농부들은 커피 생산과정에 대해서 들여다봤지. 당시 커피의 가격은 킬로그램당 65달러였지만, 농민들이 받는 것은 25센트밖에 되지 않았어. ‘코요테’라고 불리는 중간상인들은 이런 식으로 농민들을 착취해왔어. 농민들은 액수가 적은 것은 알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가격을 받을지 몰랐고, 은행 빚은 늘어만 갔어. 늘 가난했지.


그래서 호프 신부와 커피재배 농민들은 1982년 커피협동조합을 만들었어. 중간상인들 없이 팔게 되면서 농민들 소득이 늘어났지. 맨 처음에는 세 마을에서 시작했는데, 킬로그램당 83센트로 수입이 크게 늘었어. 이렇게 농민들의 소득을 늘리고, 은행 빚도 갚았어.


1985년 네덜란드의 ‘연대(Solidaridad)’라는 단체에서 일하던 니코 로전이라는 사람이 커피협동조합을 방문했어. 이 일을 계기로 호프 신부와 커피협동조합, 그리고 ‘연대’가 힘을 합쳐서 시작한 것이 막스 하벌라르 프로젝트야.


'막스 하벌라르'와 함께 자립을 꿈꾸다


당시까지 가난한 커피재배농민들은 선진국들로부터 원조를 받아왔어. 하지만 농민들은 원조에 기대는 것보다 자립을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막스 하벌라르 프로젝트는 공정한 가격으로 커피를 거래한다면 원조는 필요하지 않다는 커피재배 농부들의 생각에서부터 출발했어. ‘공정한 거래가 이뤄진다면 원조는 필요 없다’는 것은 막스 하벌라르의 모토가 됐지. 호프 신부는 <희망을 거래한다>라는 책에서, “우리는 가격을 보호해 줄 필요가 있는 불쌍한 농부들이 아니다. 우리는 친환경적이며 사회적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커피를 재배한다. 우리는 이렇게 생산한 커피를 판매할 시장을 찾고 있는 떳떳한 생산자들이다.” 라고 말했지.


‘막스 하벌라르’라는 회사의 이름은 19세기 네덜란드의 문학 작품인 <막스 하벌라르>에서 따왔어. 이 책의 주인공인 막스 하벌라르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원주민들을 위해 싸웠던 사람이야. 판 데어 호프 신부는 프로젝트에 이 사람의 이름을 붙였어.


이렇게 생겨난 ‘막스 하벌라르’는 커피 생산 농민들의 회사야. 협동조합의 농민들은 자체적으로 커피콩을 볶는 공장도 세웠지. 거기서 수출용 커피를 생산했어. ‘막스 하벌라르’라는 브랜드 이름으로 세계에 이 커피를 판매해서 돈을 벌어.


막스 하벌라르 커피의 또 다른 특징은 유기농으로 커피를 재배한다는 점이야. 화학비료를 사용해서 커피를 재배하면 수확량은 많을지 몰라도7,8년 후면 토양은 쓸 수가 없게 돼. 하지만 유기농법은 완전히 달라. 처음 몇 년간은 수입이 없지만, 커피나무를 잘 관리한다면 더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어. 화학 비료도 사용할 필요가 없지. 1.5킬로그램의 커피를 생산하던 나무도 유기농법으로 재배하면 3킬로그램의 커피를 수확하게 돼.



우리가 흔히 보는 커피는 누가 재배했는지 알 수가 없지. 누가, 얼마나 힘들게, 어떤 환경에서 생산을 한 것인지 모르고 먹는 거야.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고리가 끊어져 있는 거지. 하지만 막스 하벌라르 커피는 착취당하는 농부들이 아닌 협동조합 농민들이 재배해. 소비자와 생산자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믿을 수 있어. 생산자들은 헐값에 대기업에 넘기는 대신에 제 값을 받고 커피를 조합에 파니까 좋고, 환경도 지킬 수 있어. 소비자들은 남을 착취해서 생산된 게 아니라 ‘올바른’ 과정으로 생산된 커피, 그리고 유기농 커피를 사먹는 거야. 광고료에 쓰이거나 중간 상인들에게 돈이 가지 않으니까 농민들이 받는 돈도 늘어나지.


하지만 회사를 세우는 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야. 수입이 끊긴 중간상인들은 살인청부업자까지 고용해가며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혔어. 대기업 또한 막스 하벌라르 커피에 반발했어. 하지만 호프 신부와 농민들은 어려움을 이겨냈지.


이런 이유로 막스 하벌라르는 무역 회사인 동시에 커피재배 농부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생활 공동체이기도 해. 문제가 생기면 UCIRI 농부들은 민주주의적인 토론을 통해 문제 해결 방법을 찾아. 회사에서 나오는 이익은 회사를 위해 쓰거나 농부들의 살림살이를 돕는 데 쓰이지. 남은 돈은 불우한 이웃이나 재난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기부해. 이런 흐름이 퍼져나가면서 공정무역 운동이 된 거야.


Posted by io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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